2024.07.06 『튜브』 손원평 작가
이 블로그에서는 처음이자, 내 인생에 있어 정말 간만에 독서 후기를 남겨본다.
한적한 주말에 어느 카페에서 상상으로의 딥 다이브하기에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술술 읽히는 글,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해본다.
필력뿐만 아니라 스토리 진행에 속도 완급조절도 참 좋았다.
손원평 작가님의 글은 처음 읽어보는데, 와이프의 강력한 추천이 책의 첫장을 넘기는데 불씨가 되었다.
글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데 아직 문해한이라, 간단한 감성뿐이라도 남겨보고 싶었다.
글의 주인공 김성곤 안드레아의 인생 굴곡을 담은 단편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생각의 방향이 현대인에 맞춰진 것 같다.
이 책의 서두부터 마치 나의 미래일 수 도 있는 어떤 것을 마음 한켠에 있던 것을 끌어올려 동질감을 느껴보기도 한다.
(줄거리)
김성곤 안드레아는 여러 사업 시도 끝 회생 불가능하단 판단으로 우울함의 끝에 한강에서 자살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첫번째 자살 실패 이후에도 연탄자살을 시도해보았지만, 그의 치밀(?)하지 못한 자살시도로 불발이 그친다.
죽음의 문턱마저 못 넘은 그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와 웅크려 숨죽인다.
그러다 한 때의 자신의 사진을 우연찮게 보게되는데, 이것이 그의 작은 불씨였다.
누구 못지 않게 빛났던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대조하며 보는 그가 과거의 자신을 목표로 하며, 아주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구부정한 자세 고치기로 결심한 것, 이것이 그의 불씨를 키워갈 원동력이 되었다.
살기 위해 자전거 배달을 하다, 예전 피자가게 사장으로 있을 때 우직하게 알바했던 진석을 만나며, 상승이 시작된다.
진석과 서로 도우며 공간을 나누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게 된다.
배달 일을 하며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과 너무나도 다르게 어떤 상황이건 평온하게 삶을 직시하는 버스기사 아저씨를 보게되고 나서, 생판 남인 그에게 직접 물어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는 등 삶의 작은 변화에 초점을 기울인다.
그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외적 태도(말, 행동, 표정 등)를 객관화하며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다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바닥에서 희망을 잡고 기어올라고 있는 경험을 사업 아이템으로 승화시킬 아이디어가 극적으로 떠오르게된다. 멀어졌던 가족과도 변화한 그의 모습에 관계가 바뀌기 시작한다.
이 후 여러번의 투자 론칭 시도 속에 연거푸 실패를 경험하지만 삶의 굴곡에 대응하는 방법이 바뀐 변화한 마음가짐으로 뚝심있게 버틴다.
그러다 또 운명은 선택을 강요한다.
예전 같으면 지나쳤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버스 사고로 그를 몰고간다.
운이 좋은건지, 변화한 마음가짐 때문인지, 원래의 천성인지, 그는 결국 버스 승객들을 구조하며 사회의 관심을 받게 된다.
사회의 관심 속에서 운 좋게 자신의 사업아이템이 공론화되었고, 기존에 거절된 여러 투자처로부터 제안을 받게 된다.
운명의 장난 속에, 글 중 대기업의 창업가가 벤처정신이 투철한 성곤에게 기회를 가장해 아이템 등처먹기를 시전해버리고 아이템만 날먹해버리고 성곤을 대표직에서 해고시킨 대기업의 만행으로 그는 다시 인생의 굴곡에 싸우고 원망하는 성곤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서게된 한강에서 자살기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다시 버스기사를 찾아가게된다. 모든게 바뀐 지금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이전처럼 평온하게?
다행히 버스기사는 그때 그모습 그대로 그자리에 있었다. 성곤은 그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떻게 변치 않고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것이냐고.
버스기사는 답한다. 자신이라고 삶을 원망하지 않고 삶에 대항해 싸워보지 않았겠냐고. 그 무수한 경험을 겪고나서 이제는 삶을 흘러가는대로 두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것만 바라보는 자가 되었다고.
성곤은 그렇게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고 삶 속으로 돌아간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성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추락한 성곤이 바라봤던 가장 빛났던 자신의 시절. 나는 현재 그 시절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빛나진 않고, 직장인으로의 근본적 한계를 느끼며, 인생을 즐기기보단 걱정과 불안으로 물들여가고 있는 것 같다.
성곤처럼 자신감에 넘치지도 않지만, 나도 인생에서 자유를 느끼기 위해 성공이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너무 멀게 느껴져, 무언가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런 나에게 일침을 둔다.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가고 있는지.
삶이 목표로만 코디되어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관계와 그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놓치고 있는건 아닌지.
너무 한가지만 바라보고 있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못보고 있는건 아닌지.
아래는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들에 대해서 발췌한 것이다.
삶에서 꼽고 싶은 날이 있는가?
- 성곤은 그 영상을, 12년 전의 어떤 날을 보고 또 봤다. 인생을 통를어 단 하루를 고른다면 이날을 택하고 싶었 다. 이런 날이라면 영원히 반복해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엎드려서 뜨거운 눈물을 홀렸다. 겨우 지금 같은 상황에 이르기 위해 이 삶을 관통해온 걸까. 오로지 애통할 뿐이었다.
J에게 일침
-진석아. 난 그동안 뭘 할 때마다 늘 생각했거든. 근데 그 목표들이 순수하지가 않았어. A는 B 를 위한 행동이고 B는 c를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랬거든? 근데 그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라. 최종 목표가 무너지면 중간에 했던 A부터 Z가 전부 무의의해 지더라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거창한 목표 같은 걸 안 세우기로 했어. 행동에 목표를 없애는 거지. 행동 자체가 목표인 거야.
-미래를 생각 안 한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다시 생각할지도 모르지. 네 말대로 지금은 미래 같은 거 생각 안해. 충분히 많이 해봤거든. 근데 도착해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너무 먼 곳에다 세워놓으니까, 현재가 전부 미래를 위한 재료가 되더라고. 자세 하나 고치는 거, 그 자체가 목표 별 그 다음? 그런 거 없어. 그냥 하나라도 온전하게 끝까지 해 보고싶어.
기사의 충고
- 뭐든지 한번에 한가지씩만 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땐 먹기만, 걸을 땐 걷기만, 일할 땐 일만. 그렇게 매 순간에 충실하게 되면 쓸데없는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말은 성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등을 쭉 펴고 어깨를 여는, 목적 없는 단순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비결이었다는 걸 김성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만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박실영이 말을 이었다.
-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생각이란 건 자신만의 선글라스같은 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의 스위치부터 꺼야 하죠. 그 다음은 쉽습니다. 낙엽은 낙엽으로 보고 전봇대는 전봇대로 보는 겁니다. 빨간 건 빨갛게 노란 건 노랗게 받아들 이면 되죠.
무언가에 목 맬 때 퇴화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성곤의 발화는 주로 '바와 '에로 끝났다 이게 톤이 된대. 그 투자처가 정말 믿을 만하대. 손만 대면 완전 보장이래. 꽃 한송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조차그 꽃의 노랗거나 빨간 부분에서 추출한 어떤 성분에 투자가치가 있다는 식의 말에만 반짝 반응했다 사업가적 마인드에서는 필요한 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효용과 쓸모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는 그이게서 점차 중요한 어떤 것들을 퇴화시켰다. 김성곤 안드레아는 차츰 감탄하는 법, 놀라는 법, 과 세상을 목적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법을 잊어갔다. 그런 걸 잊은 사람에게서 진정한 미소나 여유 같은 게우러 나올 리가 없었다.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는 감정을 여과없이 느껴보는 것.
삶이 다채로운 맛과 향으로 구성된 서랍장이라면 성곤은 계속해서 한가지 서랍만 열고 있었다. 분노, 짜증, 울분, 격분, 우울, 좌절이 가득 담긴 서랍. 어느새 그는 다른 서랍을 여는 방법을 망각했다. 참다운 기쁨. 단어 안에 담아놓기 힘들 정도로 충만한 감정이 담긴 서랍은 꾹 닫혀 있었고 이제는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김성곤 안드레아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흐드러진 봄 꽃이 길을 따라 피어 있었다. 언제 꽃이 폈는지도 몰랐는 데 계절은 이미 봄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느끼지 못한다.
성곤은 시인처럼 중얼거렸다. 봐도 보지 않고 맛봐도 맛보지 않으며 들어도 듣지 않는다.